권시우「허상 속에서의 모뉴멘탈: 한강과 서울의 스카이라인과 그 사이의 어딘가」

2023-03-10



「허상 속에서의 모뉴멘탈: 한강과 서울의 스카이라인과 그 사이의 어딘가」


권시우


오늘날 기념비는 무엇인가? 수직성의 맥락에서 재고했을 때, 누군가는 자연스레 도심의 곳곳에 이상한 포즈로 직립해 있는 초대형 빌딩 같은 것을 연상할 지도 모른다. 사실 초대형이라는 표현은 조금 어색한데, 그게 그만큼 거대하게 느껴지나? 정말로? 최소한 나에겐 그런 의문들이 자연스럽게 뒤따르기 때문이다. 직전의 칼럼에서 하상현과 함께 ‘큐브’라는 공간을 재/정의하는 와중에, 물론 그 과정은 나름대로 지난했지만… 나는 뭔가 애잔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원룸과 같은 큐브에서 자생하고 있는 게 아니라, 사실 그곳에 방치돼 있을 뿐이다. 물론 방치된 상태에서 자생할 수도 있지만, 왜 하필 여기에서? 무엇보다 우리는 결국 탈출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섣부른 답변은 곤란하다. 단정할 수 없음이 아니라, 단정하는 순간 더 애잔해질 것 같아서 그렇다.


일상의 대부분을 큐브 속에서 보내는 동안 확실히 스케일에 대한 감각은 무뎌졌다. 이를테면 큐브만이 실제적이다. 초대형 빌딩은 수직적으로 거대한 무언가라기보다, 딱히 노변에서 올려다볼 필요가 없는, 그래서 스케일 자체가 사라진 무언가다. 네이버 지도에서 무언가들은 실제 스케일과 무관하게 그냥 납작한 도면의 일부가 된다. 굳이 스트리트 뷰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길을 찾는 데 별로 유용한 도구가 아니다. 그냥 파노라마를 사칭하고 있는 찌그러진 이미지를 스크린에 상연할 뿐이다. 어쩌면 이제 기념비는 찌그러진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물론 빌딩 속에 상주해 있는 사람들의 관점은 다르겠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그들이 찌그러진 이미지 속에 상주해 있는 찌그러진 환영일 것이라 짐작하면서 왠지 모르게 쾌재를 부른다. 큐브에서의 폐쇄 공포증에 시달리면서. 혹은 그에 대한 보상 심리 같은 걸지도.


《모뉴멘탈》은 역시나 기념비에 관한 전시다. 전시 서문의 일부를 인용하자면,


“오늘 기념비는 철거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동상을 훼손하는 시위가 잇따르고, 철거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총격전을 벌이기도 한다. 심심찮게 들려오는 관련 뉴스는 오늘 기념비가 올려다볼 대상이 아니라 무너뜨릴 대상이 되었음을 알리는 듯하다.”


나는 기념비에 대한 철거를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내가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시민의 표본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하여튼 중요한 것은 기념비를 실제로 경험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미술사에 가장 강렬하게 각인된 기념비는 구축주의 건물, 그 중에서도 타틀린의 <제3 인터네셔널을 위한 기념탑>(1919)일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그걸 실제로 관람하거나 올려다볼 기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것은 6m 남짓의 모형으로만 전시됐고, 실현되지 못한 건축 계획이며,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 지 한참 지난 오늘날에는 그냥 도판 이미지로만 간신히 기록돼 있다. 도판 이미지를 철거하거나 그것에 반대할 수 있을지 고심하는 일은 포스트-디지털에 심취해 있는 지금의 나 같은 사람이 부리는 기만이거나 허세다. 나는 그 사실을 단정할 수 있다. 도판 이미지는 그냥 도판 이미지다. 이미지에게 철거라는 표현은 가당치 않다. 어차피 스크롤 너머로 사라질 텐데 뭐하러 철거까지 해야되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해보자.


그러나 기념비를 근대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눙치고 넘어갈 수는 없다. 비록 기념비는 더 이상 실제적이진 않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부과된 무형의 가치는 상승세를 타고 있다. 앞서 언급한 “총격전”은 과장이 아니다. 푸틴을 단순히 철 지난 식민주의의 야심에 불타오른 전쟁 범죄자라고 부르는 건, 물론 그 자체로 온당하지만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에 충분하지 않다. 이를테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러시아가 내면화하고 있는 기념비적인 위상이 점차 불식되는 상황을 극적으로 뒤집기 위한 형편없는 전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실제로 죽거나 다치고 파산한다. 전술 핵무기를 거론하면서 세계를 불지를 거라고 위협한다. 푸틴을 포함한 모두가, 심지어 미국으로 대변되는 서방의 국제 경찰들도 기념비를 맹신한 채 그것에 휩쓸려 있다. 우리 모두의 파국을 야기하는 지금의 상황은 충분히 기념비적이라고 할 만하다.


물론 나는 총격전의 아우성에 사로잡힌 채로 겁에 질려있지는 않다. 내가 갑자기 용감해져서가 아니라, 이 모든 기념비적인 상황을 스크린의 바깥에서 스크린을 통해 복기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이미지처럼 찌그러질 리가 없다고 진심으로 바라지만, 그와 별개로 온갖 포탄들이 스크린을 뚫고 나에게 쏟아지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나를 안도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본 전시에 포함된 권세진의 <Yellow Line>은 관객으로 하여금 일종의 안전 거리를 보장해주는 것 같다. 노을에 물든 아마도 한강이라고 짐작되는 생각보다 광대한 수면 너머로 늘어선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뭔가 무심해 보인다. 내가 그런 무심한 도시에 속해있다는 사실이 생소하게 느껴진다. 서울은 전쟁의 참화와 별로 상관이 없지만… 정말 그런가? 나는 문득 작업을 구성하고 있는 드로잉 패널들을 뒤섞는 상상을 했는데, 그런 아수라장의 이미지에서 서울은 얼마만큼 자유로운가? 와 같은 질문은 해당 작업에서 별로 유용하지 않다. 서울과 서울 어딘가에 위치한 전시장을 배회하고 있는 나를 포함한 관객들 모두가 스카이라인 속으로 사라질 만큼 줌아웃하다보면 우리는 안전해진다.


사실 서두에서 굳이 이상한 포즈로 직립해 있는 초대형 빌딩 같은 것을 언급한 이유는 해당 작업 때문이다. 도대체 모뉴멘탈과 스카이라인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묻는다면, 스카이라인은 수평적이니까 모뉴멘탈이 아님, 이라고 단언할 수도 있다. 그런데 또 모뉴멘탈은 수직적이기만 한지 묻는다면, 프랭크 게리 같은 유명 건축가가 구사하는 유선형 디자인은 수직성을 포스트모던하게 해체하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실제로 프랭크 게리가 지은 루이비통 메종 드 서울은 흰 도포 자락을 연상하게끔 만드는 한국적 미와 무관하게 뭔가 풍파를 맞은 채 찌그러진 텐트처럼 보이는데, 그래서 그건 딱히 수직적이지도 수평적이지도 않은, 그 사이의 무언가를 조형하는 와중에 시공 업체가 실수로 찌그러뜨리고 만 기념비일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유려하고 그래서 당신이 미술 애호가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장소지만, 사실 나는 청담동에 있다는 그곳을 실제로 맞닥뜨린 적이 있는지 가물가물하다. 나는 미술 애호가가 아닌 것일까?


<Yellow Line>에서 청담동이 어디쯤인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나의 이동 경로에 청담동이 포함된 적은 거의 없다. 하여튼 이 전시에서 모뉴멘탈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다소 의심스럽다. 어쩌면 그게 이 전시의 기획 의도일 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일련의 작업들은 우리가 통상 기념비라고 했을 때 떠올릴 법한 상징과 그것에 대한 웅변적인 성격을 결여하고 있으며, 반드시 조각이나 입체의 맥락으로 수렴되지도 않는다. 기획자는 서문에서 2007년 뉴 뮤지엄에서 개막한 《언모뉴멘탈》을 전시의 단초로 삼고 있다고 넌지시 언급하는데, 특히나 해당 전시가 “이질적인 재료와 물질, 내용들을 섞고 한데 뭉쳐 놓으며 기념비적이고 영웅적인 ‘형식’을 거부하거나 배반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는 비-형식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지금의 소비주의에 부응하는 해체의 미학으로 귀결돼 버렸고, 본 전시는 그런 경향을 서울로 대변되는 지금-여기에서 비판적으로 답습하기 위해 섣불리 해체된 매체를 기념비의 맥락을 빌어 수습하고자 한다.


달리 말하자면 《모뉴멘탈》은 비-형식이라는 기념비를 철거하고, 바로 그곳에서 반드시 형식주의에 국한되지 않는 방식으로 매체를 재창안하고 있는 작업적 실천들을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기념비인가? 내 생각으로는 우리가 기념비 따위라고 치부하는 동안, 그것이 의도치 않게 우리에게 강력하게 현전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포스트-디지털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이 설파하는 사이비 교리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들 대다수는 비록 루이비통 메종 드 서울만큼 유려하지는 않지만, 어찌됐든 그와 유사한 맥락에서 찌그러진 텐트나 이미지들에 둘러싸인 채 그곳을 배회하거나 심지어 그 속에 거주하기까지 한다. 정말 원룸과 같은 큐브가 찌그러지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큐브는 도시에 만연한 찌그러짐을 졸속으로 구획해 놓은 공간이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찌그러짐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큐브가 실제적이라고 믿는다. 큐브라는 규격화된 단위는 사실 찌그러짐의 압력을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기념비는 철거되지도 그렇다고 해서 해체되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와 함께 찌그러져 있을 뿐이다.


지금-여기에서 매체의 재창안은 충분히 기념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시도가 “일종의 변종 기념비”로 제시된다면, 사실 그것은 기념비 차원에서 언제든지 찌그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감내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종이다. 실제로 나는 일련의 작업들을,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들이 함께 따로 구현하고 있는 허상의 모뉴먼트를 스마트폰 내장형 카메라로 최대한 다양한 각도에서 기록해뒀다. 최대한 다양한 각도 사이에서 모뉴먼트는 허상으로서 왜곡되고, 그럼으로써 찌그러진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인스타 감성 같은 게 아니다. 다만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서만 감상하거나 무엇보다 경험한다고 했을 때, 설사 <Yellow Line>처럼 줌아웃을 감행해서 안전 거리를 확보한다고 하더라도 스크린의 바깥이 거의 실시간으로 찌그러지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드로잉 패널들이 뒤섞인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설사 그것들이 회화적인 다중 시점을 포괄하기 위한 장치라고 하더라도, 그 결과 구현된 ‘이미지’의 지지체는 언제나 허상과 연루돼 있다는 것,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회화로만 기념될 수 없는 유동적인 상태에 처해있다는 것 말이다.


유동적이라는 표현은 뭔가 액체 개념을 연상하게끔 만든다는 점에서 다소 어색하다. 물론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 이후를 자본주의의 본격적인 격류 속에서 기꺼이 용해돼 버린 시공간으로 정의했지만, 근대 이후로부터 비약한 지 오래인 지금의 우리는 어쩌면 액체를 스타벅스에서 친환경적인 종이 빨대로 섭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와 저 너머의 스카이라인을 갈라놓고 있는 노을진 한강은 액체로서 유동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회화의 프레임에 정박해 놓음으로써 지금-여기가 머그컵 속에서 용해되지 않기를 염원하고 있다. 우리가 스카이라인에 밀착하기 위해 한강 속으로 투신하거나 줌인을 통해 한강을 손쉽게 건너뛸 수 없다는 사실은 각별하다. 드로잉 패널들을 실제로 뒤섞을 수 없다는 것도. 이 모든 사실들이 앞서 언급한 염원을 매개로 삼아 허상으로서의 기념비 이전에 우리에게 현전한다. 설사 그것이 일시적인 착시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사실 해당 작업은 그러기 위해서 전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게 아닐까?


<Yellow Line>은 우리 시대의 초상이라기보다,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토템이다. 스카이라인은 전쟁의 참화에 휩쓸리지도 우리를 찌그러진 이미지 속으로 과감하게 당기지도 않은 채로 그냥 무심한 척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의 자리를 보장해준다. 물론 전시 기간이 끝나면 그 자리는 철거되겠지만, 철거되기 이전에 그 자리에 합류해보는 건 딱히 나쁠 이유가 없는 선택이다. 우리가 도심 한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으니까. 물론 그 과정에서 매체가 자연스레 재창안되고 있다는 식의 가설은 다소 미심쩍지만, 그와 별개로 해당 작업이 회화적으로 포괄하고 있는 시점의 역학은 스크린에 매몰돼 있는 우리를 스크린의 안팎으로 인도하면서, 즉 단순히 원근법으로 수렴되지 않는 우리의 시점을 자각하게끔 만들면서 지금-여기에 대한 감각을 넌지시 부과한다. 그리고 이는 충분히 기념할 만한 순간이다. 심지어 관객의 자리에서 벗어나 다시 도심 속으로 찌그러지는 과정마저도. 여기까지의 서술이 너무 미신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아마도 내가 오늘날의 기념비에 매혹됐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권시우 Kwon Siwoo 



권시우는 미술 비평가다. 한때 웹진 ‘집단오찬’을 운영하면서, 신생공간의 시기에 전개됐던 각종 활동들에 대한 비평적 피드백을 집필하는 데 주력했다. 현재는 SNS로 대변되는 데이터 환경의 동역학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이미지라는 단위, 그리고 그것과 일상 차원에서 (재)매개된 사용자 개인의 특정적인 경험을 주요한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