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시우「2022년의 미술을 결산하며: 큐브가 벌인 조각 대잔치」

2023-01-09


「2022년의 미술을 결산하며: 큐브가 벌인 조각 대잔치」

 

권시우


새해의 글쓰기. 그러나 이제 막 글을 쓰기 위해 워드를 켠 시점에서, 이미 새해로 오버랩된 지 대략 일주일 정도가 지났으므로, 뭔가 거창한 다짐을 하기엔 늦어버렸다. 사실 늦었다기보다, 나는 대략 일주일 전부터, 몇몇 유저들과 마찬가지로 SNS에서 나를 포함한 모두의 건투를 빌었고, 그 와중에 다짐을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포장해 포스팅했고, 연말 결산을 하기 위해 스마트폰의 메모장에 무언가 끄적거렸으나… 그 내용을 포스팅하는 데는 실패했다. 물론 메모의 내용은 개인적으로 나름 흥미로웠지만,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포스팅으로 소진할 수는 없다는, 사실상 언제나 SNS에 과몰입하고 있는 현실의 자아를 위반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메모의 내용과 별개로, 뒤늦게나마 지난 한 해의 나를 돌아봤을 때, 나는 어쩌면 키보드 (지판) 워리어 행세를 했다. 딱히 청년 논객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다. 애초에 청년 논객이라는 모델은 00년대 후반 즈음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블로그 문화를 섭식한 결과로서, 한때 그것을 자처했던 누군가들은 현실 정치와 관련된 논쟁에 몰두했던 것 같은데, 하여튼 작년의 나는 그 이전과 이후의 나와 마찬가지로 블로그가 아닌 SNS에 무언가를 투척하기 때문에 그들과는 양상이 다르다. 투척이라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제 회고의 대상이 된 일련의 포스팅들은 뭔가 논쟁 비슷한 것을 유발하기 위한, 그보다 솔직하자면 사실 나를 둘러싼 어그로를 끌기 위한 일종의 맥거핀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나 지금에 와서 굳이 작년의 나를 심문하고 싶지는 않다. 어그로는 어그로고, 맥거핀은 맥거핀이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아무런 파문도 일으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잠깐이나마 현실로, 노트북의 키보드에 집중하고 있는 나로 되돌아오자.


뜬금없이 SNS와 스마트폰을 바보상자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지금 이 순간 현실의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내가 소유하고 있지 않은 오피스텔 원룸을 새삼 재고하고 싶을 뿐이다. 청년 주거의 문제와 무관하게, 나는 이곳에서 별로 갑갑하지 않다. 어느새 원룸으로 대변되는, 나의 경제력으로 겨우 감당할 수 있는 협소한 주거형 공간에 그럭저럭 익숙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앞서 언급했던 메모의 내용과 조응하는 측면이 있다. 미처 포스팅으로 게재되지 못한 메모의 골자는, 나를 포함한 국내 미술계 사람들이 체화하고 있는 스케일 감각이었다. 좀 더 부연하자면, 우리는 대체로 설사 반드시 원룸이 아니더라도, 큐브에 종속돼 있고, 어쩌면 무의식 중에 그곳에 최적화된 (미술) 작업을 모색해왔으며, 그로 인해 의도치 않게 자신의 스케일 감각을 제한하고 있다.


일단 그러한 경향의 대표적인 사례로 종로구 자하문로에 위치한 갤러리175를 꼽고 싶다. 해당 전시장은 한예종에서 학위를 수여한 예비 작가들이, 때로는 졸업 전시의 형식으로 본인의 작업을 연출해보는 공간으로 구실하곤 한다. 중요한 것은 그곳이 큐브거나, 큐브를 연상케하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그간 갤러리175에선 다양한 전시들이, 다양한 형식으로 구현됐지만, 그 과정은 대체로 큐브라는 제약 속에서 발생하는 각종 변수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로 망라된다. 물론 모든 국내의 미술계 사람들이 한예종 출신은 아니고, 나 또한 그렇지만, 어찌됐든 나와 동세대라고 할 수 있을 법한 동료들은 갤러리175의 사례와 유사한 맥락에서 큐브에 진입하고, 거기서 빠져나온 뒤에 다시 큐브로 진입하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즉 2010년대 초중반의 서울을 경유했던 미술이 폐허를 일종의 공유지로 삼았다면, 그 이후의 미술은 폐허를 경제적으로 구획하고 분할하는 과정에서 양산되다시피 한 일련의 큐브들을 거주지로 삼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제 큐브는 인스턴스 던전처럼 다수의 유저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분산된 공간의 형식이 아니라, 일련의 작업들을 그곳에 수납될 수 있을 만큼의 크기와 부피로 주조하는 조형의 틀로 기능하고 있다.


물론 앞서 큐브라고 호명한 모든 전시장들이 동질적이지는 않다. 다만 그곳들은 각자가 염두하고 있는 공간의 정체성에 따라 큐브를 보완하거나, 그곳에 그럭저럭 익숙해져 있다는 점에서, 어찌됐든 큐브를 발단으로 삼아 굴러간다. 무엇보다 전자가 실행하고 있는 큐브 보완 계획은 큐브 내에서 건축의 조형법을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창출하기보다, 대체로 부동산 시장의 틈새에서 보다 확장된 큐브의 판본을 물색하는 식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큐브라는 형식을 섣불리 무마할 수 없고, 당사자에게 딱히 그럴 만한 의도도 없어 보인다. 사실 전시장이든 아니든, 우리들 대다수가 건물의 세입자로서 큐브를 임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애초에 건축의 조형법과 같은 얘기는 아주 많이 허황된 소리로 들린다. 어떤 식으로 논의를 우회하건, 결국 큐브는 각자의 작업과 커리어를 매개로 미술관으로 대변되는 제도적 공간에 진입했는지의 여부와 무관하게, 미술가 초년생이 경험 내지는 경유할 수 밖에 없는 관문으로서의 공간으로 각자에게 각인돼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각 충동》(2022)은 참여 작가들이 그간 큐브 차원에서 조형했던 작업의 방법론을 미술관의 스케일에 부합하게끔 재/구성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한 사례가 거의 부재했다는 점인데, 이를테면 대다수의 (조각) 작업들은 각자에게 할당된 섹션에서 규모를 다소 무리하게 확장하거나, 일종의 표본으로 산개하는 식으로 공간을 점유하는 데 그쳤다. 결과적으로 가장 부각됐던 사례는, 전시장 내에 앞서 언급한 표본들을 위한 일시적인 무대를 가설함으로써, 표본들의 관계를 유사 퍼포먼스로 전환하려는 시도였다. 고요손은 실제로 본인이 ‘조각활용극’이라고 명명한 이벤트를 정기적으로 진행하면서 퍼포머들을 표본들 사이의 공간에 개입시켰고, 이동훈은 걸그룹의 포인트 안무를 다각도에서 포착한 이미지들을 조각 차원에서 취합한 작업들로 미묘한 동세를 연출했다. 그와 별개로 양자가 의도치 않게 형성한 무대라는 공통 분모는, 도대체 조각이라는 매체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이때의 무대는 미니멀리즘 조각이 관객에게 현상학적인 경험을 유도하기 위해 따로 또는 함께 구사했던 동사의 제스처와는 거리가 멀다. 그곳에 말 그대로 등장한 표본들은 차라리 스마트폰 시점과 동기화된 관객들을 환대하기 위한 비인간 주체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에 가깝고, 그런 의미에서 개별 조각의 독자적인 위상보다, 그것이 무대 상에서 점유하고 있는 좌표를 더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달리 말해 고요손과 이동훈 같은 작가들은 최소한 본 전시에서만큼은 각자의 (조각) 작업들을 일종의 장기말로 부리면서, 스마트폰 시점이 활성화될 수 있는 전시 인터페이스를 무대라는 형식으로 구현한 것이다. 전시 인터페이스가 표본으로 대변되는 모듈 형식의 작업들이 공간 차원에서 조율된 상태라고 했을 때, 결국 나는 다시 큐브를 재고하게 된다. 이를테면 전시장 내의 무대는 사실상 미술관의 틈새에서 물색해낸 큐브인 셈이다. 즉 미술관에 진입한 청년 조각가들의 일부는 자신의 조각 충동을 다름아닌 큐브의 제약 속에서 해소해버렸다.


다른 한 편 큐브는 다양한 시간들이 교차하거나, 그러기를 실패하는 일종의 결절점으로 드러난다. 혹은 큐브를 발단 삼아 나름대로 가지를 치려는 시간의 갈래들은, 큐브 너머로 미처 확산되지 못한 채 협소한 공간에 말 그대로 고여버린다. 그러나 고인물이라는 철 지난 인터넷의 유행어와 무관하게, 큐브 내부에서 시간의 갈래들이 얽히고 설키는 양상은 그 자체로 응축된 나머지 큐브에 기묘한 부피감을 부여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북구 창경궁로에 위치한 WESS에서 진행됐던 《조각 여정: 오늘이 있기까지》(2022)는, 해당 전시를 추동한 “여성-조각-탐방”이 WESS라는 또 다른 큐브에 불시착함으로써, 사실상 미술관 차원에서 선행됐어야 할 리서치 연구 프로젝트를 큐브 차원에서 응축해 물리적인 화두로 제시하고, 그것의 부피가 큐브의 외부에서 다방면으로 해제될 필요를 환기시켰다. 물론 지도 어플 따위는 그 당시의 WESS를 GPS에 의해 규정된 사소한 결절점으로 표기했겠지만, 그런 식의 전지적 시점이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서 큐브는 제도를 불시에 타격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벌어진 틈새 속으로 자신이 생성한 시간을 방류한다.


결국 새해의 관건은 미술관으로 대변되는 제도에 틈입한 큐브 미술의 잔여들을, 제도 안팎에서 어떻게 수습할 지에 대한 문제처럼 보인다. 물론 그에 앞서 큐브 미술이란 게 왜 하필 조각에 대한 이슈와 연루됐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지만, 애초에 스마트폰의 메모장에 끄적거리다 만 단상에서 시작된 이 글만으로는 그러한 시도를 온전히 포괄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내가 소유하고 있지 않은 오피스텔 원룸 속에서 큐브를 나름대로 숙고하다 보니, 글의 서두를 작성하던 때의 나와는 달리 이곳이 조금 갑갑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사실 그런 애매한 감각이 최근의 조각 작업들이 당면해 있는 처지를, 다소 부자연스럽게 연상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큐브로부터 탈출하려는 경제적인 야심으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 차라리 탈출을 유보할 수 밖에 없는 현재에 얼마간 순응한 채로, 이곳과 저곳과 그 사이의 공간에서 큐브를 인터페이스 차원에서 활용할 수 있는 여지들을 낙관하게 된다.


큐브를 점유하려는 조각적 시도와 본의 아니게 큐브에 귀속돼 있는 나는 어떻게 매개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큐브가 일종의 조각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스스로를 조형적으로 재편할 것인가? 비록 미술에 산개한 모든 난제들을 큐브라는 형식으로 봉합할 수는 없지만, 어찌됐든 우리는 큐브의 최전선에 있는 미술가로서, 마침내 큐브를 둘러싼 복잡한 이해관계 속으로 진입했다. 새해로 오버랩된 지 대략 일주일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그런 사실을 폭로할 수 있게끔 유도한 작년의 나에게 새삼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한편, 이제 키보드 (지판) 워리어 행세를 금지하는 바이다.









권시우 Kwon Siwoo 



권시우는 미술 비평가다. 한때 웹진 ‘집단오찬’을 운영하면서, 신생공간의 시기에 전개됐던 각종 활동들에 대한 비평적 피드백을 집필하는 데 주력했다. 현재는 SNS로 대변되는 데이터 환경의 동역학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이미지라는 단위, 그리고 그것과 일상 차원에서 (재)매개된 사용자 개인의 특정적인 경험을 주요한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